
이끼나 선태식물은 가장 원시적인 육생 식물이다. 이끼에는 꽃과 열매, 씨, 뿌리가 없다. 관다발계 즉 물관부와 체관부가 없다. 이끼는 가장 단순한 식물이며 그 단순함에 우아함이 깃들어 있다. 몇 안되는 기초적인 줄기와 잎으로만 된 구조이지만, 전 세계 곳곳에서 진화한 이끼 종은 약 2만 2천 개에 달한다.
빛을 끌여들여 고유의 녹색을 발하는 방식만으로 어떤 이끼인지 알 수 있다. 시끄러운 방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구별할 수 있는 것 처럼.
이끼가 작은 이유는 곧게 설 수 있는 구조가 없기 때문이다. 가장 원시적인 식물인 이끼는 관다발 조직이 없고 줄기가 얇기 때문에 위로 많이 자라면 무게를 지탱할 수 없다. 물관부도 없어서 땅에 있는 물을 잎이 있는 꼭대기까지 나를 수 없다.
하지만 작다고 해서 도태되지는 않는다. 보도블럭, 참나무 가지, 딱정벌레 등위 등 커다란 식물 사이에 난 빈 공간이라면 어디든 메울 수 있다.
이끼는 주로 그늘에 살지만 엽록소는 구조가 세밀하기 때문에 숲우듬지를 뚫고 들어오는 빛의 파장도 흡수할 수 있다. 상록수가 만드는 습한 그늘 아래에서 번성하는 이끼는 종종 촘촘한 초록 카펫을 이룬다. 하지만 낙엽수로 이루어진 숲은 가을이면 축축하고 거무스레한 잎사귀가 바닥을 덮기 때문에 이끼는 숨을 쉬지 못해 서식하기 힘들다. 평평한 숲 바닥위에 있는 통나무나 그루터기는 이끼가 낙엽을 피하는 대피소다.
땅위에 납작하게 누우면 바람의 속도가 약하고 지면은 따듯하다. 햇볕으로 데워진 땅이 열을 다시 당신에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표면에는 바람이 적기 때문에 열이 그대로 머무른다. 이러한 층을 경계층 (Boundary Layer, 공기와 땅이 만나는 레이어)이라고 하고 열뿐 아니라 수증기도 가둔다. 축축한 통나무 표면에서 증발한 물이 경계층에 갇히면서 이끼가 번성할 수 있는 습한 환경이 조성된다. 이끼는 습한 곳에서만 자랄 수 있다. 건조해지면 광합성을 멈추기 때문에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이끼가 성장할 수 있는 적절한 조건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으므로 이끼는 아주 느리게 자란다. 경계층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야 습기를 바람에 뺏기지 않기 때문에 성장의 기회는 더디게 찾아온다.
썩은 통나무가 곰팡이와 박테리아에 의해 분해 작업이 계속되면서 부엽토로 서서히 변하면 이산화탄소 함량이 높은 증기가 발행하는데 이 역시 경계층에 갇힌다. 실온의 대기에서 이산화탄소 농도 약 380ppm보다 최대 열배 높은 함량이다. 광합성의 원재료인 이산화탄소는 이끼의 축축한 잎으로 쉽게 흡수된다. 그러므로 경계층은 이끼 성장에 유리한 미기후를 형성하니 굳이 다른 곳에 살 이유가 있을까?
이렇게 경계층만큼 높이가 제한되므로 모두 키가 작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실은 1밀리미터에서 10센티미터에 이르는 것도 있다. 이는 서식지마다 경계층의 높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바람이 통하고 햇볕이 온전히 닿는 바위 표면에서는 경계층이 얇다. 그러므로 매우 작고 반면 습한 숲에 있는 바위에서 사는 이끼는 바위의 경계층이 숲 자체의 경계층으로 보호받기 때문에 높게 자라더라도 안락한 미시 기후에 머룰 수 있다. 나무는 바람의 속도를 늦추고 그들은 증발을 막기 때문에 대기가 건조해 지지 않는다. 습한 우림에서 이끼는 풍성하고 길게 자란다.
태양의 열기가 식는 밤이면 어느 정도의 온기를 간직한 바위 표면의 온도와 공기의 온도가 차이가 나 수증기가 물로 응결된다. 이러한 이슬에서 건조한 곳의 이끼는 종종 하루치의 수분을 얻는다.
대부분의 이끼는 건조하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 이끼에게 건조함은 삶의 일시적인 중단 일 뿐이다. 이끼는 몸 속 수분 중 98퍼센트까지 잃더라도 다시 물이 공급되면 깨어날 수 있다. 퀴퀴한 표본 캐비닛에 40년을 묵었던 이끼도 페트리 접시에 몸을 담그면 완전히 살아난다. 이끼는 쪼그라들고 메마르는 동안 새롭게 태어날 기틀을 조심스럽게 마련한다. 이끼는 내게 신뢰를 준다. 피할 수 없는 가뭄이 찾아오면 운명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강한 인내심으로 다시 비가 올 때를 기다린다.
이끼의 모든 요소를 물을 향한 애정으로 설계되었다. 이끼가 모여 있는 형상, 작은 잎의 미세한 표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물을 간직하기 위한 진화적 필요에 의해 설계되었다. 홀로 자라는 경우가 거의 없이 8월의 옥수수밭처럼 빽빽하게 군생하다. 이끼 하나를 군락에서 분리하면 바로 말라버린다. 이끼에게 빛은 물보다 중요하지 않다. 모든 잎은 물이 머물 수 있는 형태다. 물관부가 없어 표면 구조만으로 수분을 이동시킨다. 잎은 작은 아코디언처럼 주름이 져 틈 사이에 물을 가둘 수 있다. 마른 이끼에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면 이끼와 물은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긴다.
이끼는 단체로 활동하기 때문에 햇빛이 물을 당기는 힘에 저항하고 비가 내릴 때 물을 가둘 수 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뭉실한 가을 구름이 마침내 무덥던 여름 하늘을 뒤덥고 습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빗방울이 떨어진다. 나는 이끼가 펼쳐지는 모습을 보기 위해 비가 내리면 언덕으로 달려간다. 말린 줄기가 펴지면서 이끼의 모든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말린 줄기에는 포자가 가득한 포자낭이 줄 서 있다.
이끼는 본능적으로 물을 좋아한다. 말라 바스락거리던 이끼는 폭풍우가 지나고 나면 물을 머금어 부풀어 오른다. 물이끼 Sphagnum moss가 자신의 무게보다 20~40배 달하는 물을 흡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성능이 팸퍼스 귀저기에 버금가는 이끼는 최초의 일회용 기저귀였다.
물이끼에 대한 가장 놀라운 사실은 몸 대부분이 죽어 있다는 것이다. 죽은 세포로 채워진 물이끼는 엄청난 양의 물을 저장하는 능력 덕분에 물이끼는 원한대로 생태계를 바꿀 수 있다. 물이끼가 있으면 토양 입자 사이에 공기 대신 물이 차기 때문에 토양은 축축해 진다. 죽은 물이끼가 물에 잠겨 생긴 이탄(Peat)은 혐기성이어서 뿌리 역시 숨을 쉬어야 하는 대부분의 식물은 자라지 못한다. 그결과 늪은 나무가 성장할 수 없어 사방이 트이고 해가 잘 든다.
축축한 지대는 산소가 부족해 미생물의 성장도 저해한다. 따라서 죽은 물이끼는 매우 느리게 부패한다. 심지어 수 세기동안 거의 변하지 않을 수 도 있다. 가라앉은 물이끼는 사라지지 않고 몇 년동안 누적되면서 점점 늪을 채운다. 이러한 보존 효과 때문에 덴마크의 한 늪에서 이탄을 채취하던 사람들은 2천년 전 매장되어 완벽하게 보전된 시신을 발견했다.
물이끼 매트가 깔린 늪은 끈끈이주걱, 사라세니아 (Pitcher plant), 파리지옥 같은 벌레잡이식물의 안락한 서식지다. 습지에 무수히 많은 사슴파리와 모기는 날아다날아다니는 동물성 질소 농축액이다. 이러한 질소를 얻기 위하여 진화된 끈끈한 덫 또는 주전자 같은 정교한 식충성 잎은 뿌리로는 얻을 수 없는 영양소를 보충해 준다.
사라세니아 (Pitcher plant), Kew Gardens (2024년 5월, 왼쪽)
물이끼는 산소 및 질소 부족을 일으킬 뿐 아니라 ph도 바꾼다. 늪 가장자리의 ph는 희석한 식초와 비슷한 4.3이다. 높은 산성도 덕분에 물이끼는 항균 성질을 지닌다. 박테리아 대부분은 ph가 낮은 곳에서 억제된다. 이 같은 특성과 막강한 흡수성 때문에 한 때 붕대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탄을 서서히 태운 연기가 맥아를 첨가한 곡물에 스며들면 가을의 풍미가 나는 스카치 위스키가 된다. 싱글 몰트 스카치위스키의 독특한 향은 늪지에서 채취한 이탄의 품질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이탄의 가장 큰 상업적 용도는 정원에 쓰이는 객토다. 진흙이 너무 많은 정원을 가꾼 적이 있는데 이탄을 사서 땅에 섞었다. 이탄 속 유기물은 점토 입자 사이의 간격을 떨어뜨려 흙을 가볍게 만든다. 또한 이탄을 정원에 뿌리면 이탄 안에 있는 죽은 세포의 흡수성 땜누에 흙이 물을 잘 저장하게 된다.
출처: 책 이끼와 함께 (로빈 월 키머러 저),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