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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보리텀의 11월_슛뚜, 제주 선인장 밭 그리고 가을은 한해의 시작

최종 수정일: 2023년 12월 25일



슛뚜의 '낯선 일상을 찾아, 틈만 나면 걸었다'를 읽고 영국행 비행기 티켓을 사기 위해 모아둔 돈을 떠올렸다. 내년 2월이면 3년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움이 차고 넘치지 않더라도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수트케이스 없이 여권과 약간의 파운드만 장착한 채 가벼이 가서 살포시 내려앉을 수 있는 모든 동선이 눈에 선하다. 히드로 공항에서 쥬빌리 라인을 타고...그렇게 다시 큐와 리치몬드로.


Great Dixter Gardens에서 일할 때 가을, 겨울 정오가 되면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산더미 같은 퇴미 파일을 무척이나 신기해 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왜 저렇게 온갖 정원 잔재물들을 탑처럼 쌓아 올리는 건지 그리고 지역 원예 소사이어티에서 사람들이 정말 죄다 흙 Soil에 대해서 그렇게 떠들어 대서 좀 당황했다. 내 인생에 쏘일이 그렇게 훅 들어와서 진지하게 화두에 오르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생소했지만 내 인생이 그렇게 서서히 정원과 가드닝으로 Steering Wheel을 틀고 있음을 직감한 행복한 순간이기도 했다.


딕스터 정원의 퇴비 1년-2년-3년차 모습 (왼쪽), 딕스터 퇴비 파일 (파란색 모자를 쓰고 있는 여인=나)


'정원가의 열두달' 11월 세션도 쏘일을 얘기하고 있다. 11월은 땅을 갈기에 가장 좋은 때, 흙을 위한 달, 흙을 갈아엎고 일구는 달이라고 말한다. 작년 롯데백화점 센텀시티 식물까페에서 잠시 일할 때 사람들이 분갈이 하는 나를 보고 흙을 어떻게 조제해야 하는 지 물었다. 기억해 보건데, 나는 '고슬고슬'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면서 흙과 물주기를 밥과 물의 양에 빗대어 자주 설명하곤 했다.


이 책에서도 놀랍게도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고슬고슬' 부서져 내리되 너무 덩어리져서는 안되며, 삽을 꽂아 넣었을 때 쩍쩍 금이 가서도 질척여서도 안 된다. 너무 쉽게 말라붙지도 단단하게 굳어서도 안 되며 구멍이 숭숭 뚫리거나 진득하게 뭉쳐져서도 안 된다. 한 삽 가득 갈아엎었을 때 기분 좋게 숨을 내쉬며 자잘하고 푹신푹신한 경작토로 부서져 내려야만 좋은 흙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군침 돌 만큼 맛있어 보이는 흙, 사람 손에 의해 잘 길들여진 고귀한 흙, 깊은 풍미와 촉촉함을 간직한 흙, 부드럽기 그지없는 흙.


11월 추운 날씨에 쏘일은 얘기하는 건 아마도 가을 막 바지에 이를 때까지는 얼마든지 식물을 옮겨 심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 일 것이다. 그리고 이식 후 정원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일. 때 이른 서리를 한두 번 맞는 건 상관없지만 더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 화단에 짚이불을 덮어주어야 한다.


블러그 타이틀을 '가을은 한해의 시작'이라고 감히 말한 건 큰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의 겉모습만 놓고 본다면 가을을 한 해의 끝자락으로 보는 것도 꽤 일리는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보다 깊은 의미에서 가을을 한 해의 시작이라고 보는 게 더 맞다. 왜냐면 가을은 새 잎이 싹트는 철이기 때문이다. 잎이 지는 것은 겨울이 찾아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봄이 시작되어 새로운 싹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해내지 못한 일들은 4월에도 일어날 수 없다. 개암나무의 클립만 한 크기의 배아가 그 증거다. 개암나무 수꽃들은 지금부터 점점 길게 자라다가 2월이면 피어나 꽃가루를 뿜어낼 것이다. 가을에 찾아다니는 이런저런 미세한 식물학적 지표들은 결국에는 봄이 오고야 말 거라는 기분 좋은 신호들이다.



퍼플 & 벨벳티한 느낌의 Tibouchina urvilleana (영명 princess flower), 난대온실


제주에서 발견한 단풍잎이 너무 아름다운 황근 (hibiscus hamabo, 영명 yellow rose mallow, 아욱과)



제주 월령리 선인장 (Opuntia ficus-indica) 군락지, 선인장 씨앗이 원산지로 알려진 멕시코에서 해류를 타고 이곳에 밀려와 모래땅이나 바위에 기착한 것이 아닐까라는 설이 있다. 6-7월에 꽃이 피고 11월에 열매가 익는다.


억새(Micanthus sinensis)의 꽃이 서서히 개화하는 모습, 사초원


Schizachyrium scoparium의 개화모습, 사초원


Aloe deltoideodonta, 아열대 전시원


모진 계절 겨울에 새로운 꽃과 잎이 될  겨울눈(꽃눈과 잎눈)의 어리고 연한 조직이 봄이 오길 기다린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지만 매력적이다. 식물처럼 생각하고 그들의 라이프사이클 대로 살아간다면 2023년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12월은 습관적으로 시작이 아닌 정리하는 달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나의 올해 마지막 블러깅도 곧 그렇게 wrap-up하는 느낌으로 돌아올 거 같다. 눈도 오고 춥지만 따듯한 12월이 되고 있길!


겨울눈, 12월 12일


참고: 정원가의 열두달, RHS Gardening Through the Year, 야생화의 위로, 국가표준식물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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